[인물]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옥수수 파이프를 물고 있는 맥아더. 정작 맥아더 본인은 담배를 안피웠던것으로 알려져있다.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제 2차 세계대전의 인물에 있어서 가장 극과 극을 달리는 평가가 존재하는 인물을 뽑자면 아마도 그 첫번째 인물은 더글라스 맥아더가 아닐까 한다. 같은 동시대의 인물, 샤를 드골은 그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하였고, 롬멜의 전설에 종지부를 찍은 몽고메리와 영국군 참모총장을 지낸 알란 브룩은 그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참전한 미국 군인 중에서 최고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거의 모든 워싱턴의 정치가들은 매우 냉소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는 도쿄, 마닐라, 캔버라에서는 영웅이였지만 워싱턴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미국 역사상 최다 수훈자이기도 한 그는 (자국에서만) 23개의 훈장을 받았고, 제1차 세계대전에는 언제나 비무장 상태로 최전선에서 정찰을, 또 전투를 했다. 한번은 독가스를 마시는 바람에 거의 죽을뻔한 경험도 해봤고, 한국전쟁중에는 압록강 근처 중공군 기지를 '비무장'상태로 비행하기도 했지만, 병사들은 그를 참호속의 더그라고 불렀다.

여기서 한번 불가사의한 그의 약력을 한번 살펴보자

1903년 - 당시 웨스트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 역사상 두번째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그 한명은 남북전쟁 당시의 남부군의 리 장군이였다고 함. 지금까지도 맥아더를 넘어선 사람은 단 3명에 불과했다고 전해짐)

1917-1918년 - 대령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 미국 최연소 장군으로 승진, 종전과 함께 최연소 소장으로 승진. 종전 당시까지 자국에서만 두개의 수훈 십자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 일곱개의 은성무공훈장(Silver Star), 두개의 상이 훈장(Purple Heart)를 수여. 이외에도 다른 연합군으로 부터 총 19개의 훈장을 수여함.

1919-1922년 - 미 육군사관학교장으로 재임. 장교교육의 개혁착수. 근대 장교교육의 발판을 마련.

1930년 - 중장으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불황으로 군예산 삭감이 대대적으로 추진. 이에 맞서 임기내내 국방예산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전개. 이때 장비보다는 인력을 지키는데 초점이 맞추어졌음. 이후 이 인력들은 2차 세계대전 발발시 최소 대령부터 4성장군들까지 임명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공헌함. 훗날 회고록에서 인력만은 유지할려고 했던 이유를 무기는 낡지만 리더십은 낡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함. 미국 건국이래로 국방예산이 가장 적은 시점에서 반자동소총 도입.

1935년 - 육군참모총장 임기만료. 필리핀 군사고문관으로 파견. 그의 퇴임시 내놓은 보고서에서 향후 전쟁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줌. 이에 대해 B.H 리델하트가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함.

1937년 - 퇴역.

1941년 - 소장으로 현역복귀. 중장으로 대장으로 초고속 진급. 필리핀 주둔 미군과 필리핀군 총사령관으로 임명. 일본의 진주만 기습. 미국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1942년 - 남서태평양 전역 연합군 총사령관에 임명.

1944년 - 육군원수로 임명.

1945년 -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일본 점령 연합군 최고사령관. 미국 극동아시아 지상군 총사령관.

1950년 - 한국전쟁 발발.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

1951년 - 전선이 고착되자 만주에 핵폭탄을 사용해야 된다고 주장함. 이것에 그치지 않고 대만의 국민당 군대를 중국에 투입해 제2의 전선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 이를 계기로 유엔군 총사령관에서 해임. 20여년만의 귀국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이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그는 필리핀 방어책임자로써 초반에 알수없는 지시(대만으로 정찰기를 안보냈다)를 내리고 해안선에서 저지하겠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바탄반도로 몰려 쫓기는 신세가 된다. 바탄반도로 쫓겨가면서 탁월한 후퇴전략으로 미군과 필리핀군이 두동강이 나버리는 최악의 상황을 막아냈으나 원래 바탄반도에 비축되어있던 물자들을 서로 다른 네곳에 옮겨 놓아버리는 바람에 바탄반도로 퇴각시 심각한 식량부족을 초래하였다.

해상보급로가 거의 봉쇠된 상황에서 결국 바탄반도에서의 항전은 한계에 다다르게되었고, 그즈음에 루즈벨트에게서 오스트레일리아로의 소환 명령을 받아 탈출하였다. 그의 후임으로 웨인라이트가 임명되었으나 그와 남겨진 7만여 병사는 그가 탈출한지 얼마 안돼 항복하게 된다.

오스트레일리아로 맥아더가 탈출하게된 배경에는 정치적 이유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다. 당시 오스트레일리아는 영연방국가의 일부로써 대부분의 군대를 북아프리카로 보낸 상태로 본토에는 일본군의 공격을 방어 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군대가 없는 상태였으므로, 국내불안이 더더욱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였다. 맥아더는 그곳에서 그만이 가지고 있는 화려한 언변과 쇼맨쉽으로 동요를 억제하며 일본군과 싸우게 된다.
 
호주에서 남서태평양 전역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그는 이곳에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뒤 미국의 여러전선중 가장적게 배정된 한정된 15%라는 물자와 해외로 파견된 병력의 12%(이것은 그나마 필리핀 침공 직전의 그에게 할당된 물자와 병력이였다.)를 가지고 한창 팽창가도를 달리고 있던 일본과 싸워야만 했다. 남서태평양전역 연합군 총사령관이라는 타이틀과 걸맞지 앉게 민병대 수준의 오스트레일리아군과 미군 1개의 사단만으로(1944년 말기에 다른 크루거가 이끄는 1개 야전군이 추가되었고, 항공모함 한척없는 제7함대가 배속되었다.) 수세에 몰린 상황속에서 수동적인 방어전술 대신에 병력의 열세를 감수하고 공세로 전환. 그가 '토끼뜀'이라고 말한 섬 건너뛰기 전술로 다른 전선들에 비해 적은희생으로 많은 섬들을 탈환했다. 

일반적으로 육군쪽에서 생각하는 강과 바다는 장애물이라는 기존의 개념대신 길이라는 또 다른 개념을 받아들임으로써, 일본군에게 바탄반도에서 그가 당했던것 처럼 '기아와 열병' 이라는 새로운 동맹군으로 하여금 싸우지 못해서 안달이난 일본군에게 물질적으로도 그리고 심리적으로도 큰 패배감을 주었다. 남서태평양 지역의 10만 일본군이 밀집한 요새인 라바울에서.. 이곳은 중요 요충지였으므로 일본군은 당연히 적이 올것으로 생각하고 온갖장애물에 지뢰밭에다 해안 요새를 구축해 놨으나 그는 공격하는 대신 우회함으로써 1943년부터 1945년 종전시까지 총알이 아니라 기아와 열병으로 죽였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할복할 기회조차 박탈해버렸다. 결국 히로히토가 무조건항복선언을 했을때 그 섬의 많은 병사들이 심리적 박탈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정글의 짐승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가 이끈 부대는 사상자수가 같은 일본군을 상대로 니미츠가 이끈 과달카날이나 사이판에서 싸웠던 해병대와는 달리 사상자가 유난히 적었는데, 유럽에서 일어난 '벌지 전투' 사상자가 제 2차 세계대전 전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시작해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때까지, 맥아더가 이끈 부대의 총 사상자 수보다 많았다는 사실에서.. 이는 열대병으로 인한 사상자까지 감안한 수치로 맥아더가 이끈 부대에서 나온 전체 사상자 얼마나 적은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도중에 그가 한 전투에 대해서는 지금은 거의 알려진게 없다. 아이타페 전투, 부건빌 전투, 로스네그로스 전투, 포트모르즈비 전투, 마닐라 전투등 수도 없이 많지만 이중 우리의 알고 있는것은 거의 없다. 역사라는게 참 이상해서 큰 인명피해를 입을수록 사람들 머리속에서 기억되는 경향, 아니 기억해야만 하는 무언의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럴것이다.

오늘날 대다수가 그의 '역겨움'만을 기억하고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맥아더는 전쟁초 실패들을 뛰어넘어 큰 업적을 이룩한것은 분명하다. 


*맥아더가 토끼뜀이라고 지칭한 전술은 전통적인 우회전술(ByPass)에 기초한 것이다. 매우 고전적 전술임에는 분명하나 이를 태평양처럼 터무니 없이 넓은 전장에서 처음으로 실행한 사람은 맥아더였다.

*제7함대는 과거 명칭조차없었던 '맥아더의 해군'이 이름을 바꾼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맥아더의 해군'이 초기에 지녔던 전력은 수송선 몇척, 구축함 몇척, 경순양함 세척, 그리고 주력을 이루었던 PT보트 부대들이 전부였다.

*맥아더가 한국전쟁에서 처음으로 공수작전을 했다는 소리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내에서 처음으로 공수작전을 한사람이 맥아더다. 수송기가 없어서 B-17폭격기를 이용해 1개 연대병력과 이를 지원할 공병대들을 뉴기니 북부지역에 공수한적이 있다. 그는 태평양 전쟁에서만 3차례 공수작전을, 87회의 상륙작전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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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떼굴 | 2008/05/24 14:50 | 전쟁속 인물들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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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gg at 2008/11/03 16:48
질문을... 맥아더의 필리핀 진공과정에서 62000명의 미군 사상자가 있었다는 주장을 http://www.mediamob.co.kr/HeadLineView.aspx?ID=13145에서 본 반면에... http://user.chollian.net/~hartmannshim/japaninvasion.htm 여기서는 2000명이라는 주장을 봤습니다..
위에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맥아더의 사상자 비율이 굉장히 적다고 하셨는데, 혹시 어느쪽이 맞는건지 알수 있을까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맥아더가 담당한 전투들에서 사상자가 적었던 이유를 혹시 알 수 있을까요?
Commented by gg at 2008/11/03 17:05
죄송합니다 직접 찾아봐야하는건데, 사상자가 62000명 맞군요. 사망자 비율이 10000명 수준이라 그렇지.. 일본군이 348000명.. 확실히 말씀하신대로, 병력손실비율이나 사상자 비율로 따지면.. 맥아더가 뛰어나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수 있는 것이군요. 이오지마나 과달카날같은 전투와 비교하면...
Commented by 떼굴 at 2008/11/06 03:06
아무리 지휘관이 훌륭하다고 해도 2000명이라는 숫자는 불가능하죠. 사상자가 적었던 이유는 일본군 남태평양방면 최고사령관이였던 데라우치가 레이테 사수를 고집하는 통에 4개 사단병력을 연속해서 축차투입했던 이유가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도중에 1개 사단병력이 맥아더 휘하 제5항공군에 수장되어버리기도 했지요(...)

이후 필리핀 본토인 루존 탈환을 위해 링가엔만에 상륙하는 과정에서 독일군의 전격전은 아니더라도 매우 빠른 속도로 돌파를 했고 결국 일본군을 두동강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이과정에서 야마시타가 이끌던 병력 270,000명 중에서 100,000명 ~ 130,000명 정도만 조직력을 유지한 채 퇴각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조직력을 잃어버리고 뿔뿔이 흩어져서 저항하는 일본군을 제압하는데에는 시간이 걸렸지만 희생은 크지 않았겠지요.

이 두동강을 내는 과정에서 제11 공수사단이 큰 활약을 펼친것으로 알고있습니다.
Commented by 나그네 at 2009/02/14 10:56
필리핀에서 맥아더의 남서태평양군이 낸 사상자가 6만2천명이면 타라와와 마킨 마리아나와 이워지마에서 난 니미츠의 해병대가 낸 사상자와 맞먹거나 거의 이를 상회하는 수치인데, 이 희생으로 미군이 태평양전선에서 실질적으로 얻은 성과가 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중부태평양에서 미해군과 해병대가 전진하면서 일본해군은 실질적인 압박을 받았고 500만이 넘는 육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필리핀에서 미군이 낸 희생으로 얻은게 뭔지요?
Commented by 떼굴 at 2009/03/22 02:40
하나. 데라우치가 이끄는 남태평양방면군 중 필리핀에서 비명횡사한 사람을 제외한 120만명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둘째. 니미츠가 주장했던 포모사(타이완) 공략대신 미국에 우호적인 필리핀을 공략함으로써 포모사(타이완)을 공략하는것과 거의 대등한 효과를 얻고 인명손실을 크게 줄일 수 있었습니다.

니미츠의 주장대로 지형이 험한 포모사(타이완)을 공격했으면 아마도 이오지마와 거의 비슷한 사상률이 발생했을겁니다. 포모사에 주둔한 일본군 병력의 밀집도가 필리핀보다 높으면 높았지 결코 떨어지지는 않았지요.

셋째. 위에서 언급한 내용의 부수적 설명입니다만 이후 일본이 점령중이였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 말레이반도, 버마, 네덜란드 동인도령(인도네시아)등으로 향하는 보급품이 급감했습니다. 물론 일본으로 가는 천연자원의 수량도 급감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군수생산에 엄청난 차질이 생긴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전부터 미해군, 특히 독일의 유보트 전술을 흉내낸 잠수함 작전의 압박을 당해 보급량이 줄어들고 있었지만 미국이 그 골목에 위치한 필리핀을 차지한것은 결정타였습니다)

넷째. 사실상 일본해군의 주력을 모두 끌어내서 수장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일본해군은 오키나와를 향한 편도분의 연료만 싣고 출발한 텐고쿠(천국 -_-;)작전을 마지막으로 '작전수행능력'을 완전히 상실합니다.

다섯번째. 미국의 필리핀 점령으로 보급이 크게 줄어들어 기력을 상실한 일본군을 버마에서 몰아내 다시 중국으로 향하는 보급로를 열 수 있었습니다. 이 통로를 통해서 영국 14군이 버마평원을 쓸어버리고 중국으로 진입하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만 뒷심(이랄까 사실은 병력차가 워낙 커서) 제한적 성과만 올릴 수 있었지요.

여섯번째. 루즈벨트가 4선을 하는데 상당한 공헌(..)을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당시 유권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군요. 분명한 것은 맥아더가 필리핀 침공을 루즈벨트의 4선과 밀접하게 연관시켜서 설득했다는 점입니다.

이외에도 세세하게 따져보면 다른 것들이 있겠지만 크게 보면 이정도입니다. 물론 필리핀 점령에 시간이 상당히 소요되어 다른곳에 빼돌릴 병력이 줄어든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도 생각을 해봅니다. 맥아더가 필리핀에서 이끌던 병력들을 이끌고 다른곳에 가서 싸운다면 이만한 전략적 효과를 낼 수 있었을까? 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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