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22일
한국군 최악의 참사 #1 현리 전투(라고 쓰고 희대의 패주극이라고 읽는다.)
현리전투는 1951년 5월 17일-25일 사이에 현리지역에서 벌어진 희대의 패주극이다.
한국전쟁 초기 의정부방어전에서 7사단을 사실상 '해체'시켜버리고 인천상륙작전으로 거침없는 북진중 예기치 못한 중공군과의 교전으로 한번 국군 2군단을 말아먹은적이 있는(...덕천 전투. 청천강 부근에서 중공군에 사실상 포위 전멸당함 -_-;) 유재흥 장군을 도대체 무슨이유에서인지 한직으로 좌천되어있던 한강 방어전에서 눈여겨 볼만한 활약을 보여준 김홍일 장군 대신 국군 3군단(3사단, 9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인제 - 홍천 사이에 교통 요충지였던 오마치 고개가 있었는데 이곳은 미 10군단의 담당지역이였다.
하지만 이 요충지를 두고 미 10군단장 아몬드 장군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국군 3군단장 유재흥 장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5월 15일이 되자 중공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15일 인제지역, 16일에는 가평을 향해 엄청난 병사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당시 미 10군단에 배속되어 미 10군단의 우익인 인제지역을 방어하던 국군 5, 7사단은 엄청난 병사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중공군의 돌파를 허용해 버리고 말았다.
반면 가평지역은 영연방국가들로 이루어진 여단이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를 훌륭히 방어해냈다.
그런데 중공군이 돌파한 인제을 통해 30km를 내달려 온 중공군 1개 수색중대가 우회침투해서 오마치 고개를 점령해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초기에는 불과 1개 중대규모였지만 3군단장 유재흥 장군은 이를 보고 받고도 대응을 하지 않았다. 결국 중공군이 튼튼한 방어선을 마련한 다음에서야 위협을 인식하고 겨우 각각의 사단에서 1개 연대씩을 차출해서 공격이 이루어졌으나 실패, 사실상 유일한 후방퇴각로를 상실했다고 느낀 국군 3군단은 병사는 물론 고위 지휘관들까지 공황에 빠졌버렸고 여기서 군단장 유재흥 장군은
이 어처구니 없는 패주극에 대해 훗날 군단장 유재흥 장군은 '도망을 간 것이 아니라, 연락기를 타고 작전 회의에 참석하러 간것이였다.' 라고 말했는데, 군단이 포위된 마당에 군단장이 포위되어있는 군단을 내버려두고 작전회의를 한다는것 그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이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주코프에게 포위 전멸을 당한 독일 제9군을 이끌던 파울루스 장군도 전선에 있었지 작전회의 한다고 전선을 이탈해 후방으로 간적이 없었다. -_-;
거기에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을 보면 이때 유재흥 장군은 작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적혀 있다.
앞에서 다룬 문제의 30연대장의 증언과 백선엽 장군의 이야기를 조합해보면 결국 앞뒤가 안맞는 변명을 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군단장, 사단장이 모두 도망가버린 마당에 병사들은 간신히 소총정도를 휴대하거나 아예 그냥 민간복장으로 갈아입고 지휘관이 없는 3, 9사단은 무계획적인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받아 군단이 사실상 와해되어버렸다.
일주일 가량의 전투아닌 전투의 결과 병력의 65%정도만 무사히 도망치는데 성공했고 군단의 보유한 중화기, 야포(특히 군단 포병이 사용하던 최신형의 155mm야포)들은 모두 중공군에게 노획당했다.

미 8군 사령부에서는 미 10군단의 예비대였던 미 3사단의 2개 연대를 차출해 소방수로 투입. 거의 60-70km나 뚫고 들어온 적의 돌파구 차단에 나서게 되었고 얼마되지 않아 중공군의 고질병인 보급문제로 공세가 현저하게 약해진 시기에 왼쪽에서 운두령을 공격해 중공군의 퇴로를 차단함으로 역으로 포위, 공격함으로써 사태가 진정되었다.
하전부리에서 5월 20일까지 수습된 병력은 65%, 장비는 30%도 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다음은 전방 지휘소에서 만난 밴 플리트 장군과 유재흥 장군의 대화이다.
밴 플리트 : "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
유재흥 : " 잘 모르겠습니다. "
밴 플리트 : "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
유재흥 : " 그런 것 같습니다. "
밴 플리트 : " 유장군,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다른 보직이나 알아보시오! "
이 희대의 탈주극으로 국군 3군단은 5월 26일부로 해체되었고 예하 9사단은 미 10군단에, 3사단은 국군 1군단에 배속되었으며, 육군본부에 존재했던 전방 지휘소가 폐지되었다.
# by | 2008/10/22 23:51 | 전쟁사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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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유재흥 장군이 패배만 겪은것이 아니지만 군단 두개나 말아먹은 것에 대해 변명은 여지는 없습니다.
기껏해야 사단장이나 해먹을 인물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임진왜란때 원균이 이순신장군과 동급인 선무1등공신으로 추대된걸로 봐서, 한민족은 정신이 완전히 맛간 민족인게 맞아요.